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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일송정 푸른솔은 1983년

by 꿈의 숲 2011. 5. 26.

 

일송정 푸른솔은 1983년

감독: 이장호

출연: 진유영, 김운하, 윤양하, 이보희, 김천만 (신입병사 역)

비디오출시: 1984. 7. 20(주)삼부프로덕숀

 

22회 대종상영화제(1983) 수상계몽부문 작품상, 미술상(조경환), 특별상 신인부문(이보희)

 

 

청산리 전투(대첩)(1920년 10월)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 김좌진 장군(金佐鎭, 1889년 ~ 1930년)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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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발생배경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은 고조되었다. 특히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항일 무장투쟁에 대한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독립군들이 속속 조직되었다. 대표적인 독립군들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된 서로 군정서(西路 軍政署), 의병세력이 중심이 된 대한독립단,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 부대인 광복군, 기독교계 인사들이 대한 국민회를 결성하고 그 산하에 무장군으로 편성한 대한독립군, 김좌진 장군이 중심이 되어 중광단·정의단을 통합하여 발전시킨 북로 군정서(北路 軍政署)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독립군들은 국내로 몰래 잠입하여 일본군을 기습공격 하여 큰 타격을 주고 있었다. 특히,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포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당시 독립군을 하찮게 보았으나 뜻밖에 참패를 당하자,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와 관동 지방에 주둔 중인 부대 및 시베리아에 출병 중인 부대를 동원하여 세 방향에서 독립군을 포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독립군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내용

 

1.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계획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지역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돌입했다. 일본군 제13사단, 제14사단의 2개 사단이 독립군부대의 소재파악에 열을 올렸다.

 

2. 독립군부대의 대응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부대는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주철도 수비대가 쑹화강을 건너 서진하여 3면으로 북로 군정서군을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때문에 대일관계에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근거지를 옮겨 백두산으로 입산하여 낭림산맥을 타고 게릴라전을 펼칠 계획이던 북로 군정서군은 1,500명으로 편성된 전투대대인 제2제대(이범석 지휘)와 비전투요원 1,000명으로 구성된 제1제대(김좌진 총사령관 겸임 지휘)로 하여금 180량의 치중차(輜重車)를 이끌고 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은 월등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기에는 지형이 험준하지만 독립군들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던 백두산 일대가 적당하다고 보고,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청산리는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북간도의 연길과 용정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주위의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였다. 청산리전투는 이처럼 독립군이 이동하는 중에 추격해오는 일본군과 청산리에서 격돌한 전투였다.

북로 군정서군은 장장 80리의 골짜기에 100m 내외의 밀림으로 자연성을 이룬 청산리의 백운평 골짜기로 제대를 진출시켜 기습포진을 펴고 적을 기다렸다. 9월 10일 아침, 적의 척후가 나타나 식은 말똥을 만져보고 아군이 백운평을 지나간 지 오래된 것으로 오인, 전위사령을 선두로 기마대·보병·공병의 1만 혼성여단이 골짜기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군은 적이 함정 속으로 다 들어올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이범석이 쏜 총이 전위사령을 거꾸러뜨림과 동시에 공격을 퍼부어 3차로 적의 부대가 몰려들 때까지 적 2,200명을 사살하고 아군 20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타격을 받은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자, 아군은 주력 부대가 그대로 백운평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밤사이 120리를 강행군하여 갑산촌에 도착함으로써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이어 아군은 시마다가 지휘하는 120 기병중대가 한국인 촌락인 천수평에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집단병력을 투입해서 도망자 4명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하고 시마다 중대장이 가노 연대장에게 보내는 정보문서를 입수, 19사단의 2만 병력이 어랑촌에 있음을 알고 기선을 제압, 어랑촌 전방의 마록구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부터 만 2주야에 걸친 혈전을 통하여 2,000명의 아군 병력은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이용해 2만의 적병 중 1,000여 명을 전사케 하고 90명의 아군 전사자를 내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역사적의의

 

5만 병력을 2,500명으로 맞아 3,300명을 죽인 청산리 3차의 싸움은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하자 독립군 근거지를 없애려고 갖은 시도를 다하였다. 독립군은 물론 만주에 사는 조선인 양민 학살, 조선인 학교 방화 등은 물론이고, 간도에서는 무려 3,600여 조선인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하였다(간도참변: 1920. 10. 11.).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소련·만주 국경의 밀산부에 집결했다가 다시 소련령 자유시로 근거지를 옮겼으나, 자유시 적색군은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하여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공격해 많은 독립군이 무기를 빼앗기고 희생당하였다.

1925년에 일제와 만주 군벌은 독립군 탄압을 위한 협정(미쓰야 협정)을 맺고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 측에 인도하기로 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독립군은 유명무실해졌다.

 

 

참고자료

 

신재흥,《항일 독립운동사 연구》 신서원, 1999

주진오 외4,《한국 근·현대사》 중앙교육진흥연구소, 2002

한국 근현대사연구회,《한국 독립운동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1998

 

 

집필자

 

전대양(관동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청산리대첩 내용

자료출처(국가기록원):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view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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