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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흔적

구룡사(龜龍寺) 계곡(溪谷) 2

by 꿈의 숲 2010. 10. 29.

 

 

 

 

 

 

 

 

 

 

 

 

 

 

2010.10.28  치악산 / 구룡사(龜龍寺)계곡 다녀오다 

위치: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번지

 

*구룡사 소개

 

백두대간의 주맥이 오대산을 거쳐 서쪽으로 태기산을 지나, 국동의 명산 치악산에 이르고 거기에 영서의 대찰 구룡사(龜龍寺)가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천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영험한 아홉바다의 용이 구름을 풀어 놓는 형상을 한 천하의 승지”인 치악산에 구룡사는 서기668년(신라 문무왕8년)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셨으며 나말려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중의 하나로 수많은 고승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구룡사는 원주시 소초면 학곡2리 치악산(1288m) 국립공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장목(금강송)숲길의 일주문(원통문)을 지나 사천왕문에 들어서 구도의 계단을올라 문화재인 보광루밑을 나오면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유래 및 역사

 

아득한 옛날이라고 할 천삼백년 전의 일이다. 메마른 품이 학같은 늙은 스님 한 분이 원주지방에 찾아와 절자리를 두루 고르고 있다가 관서우 거산 치악산을 향해 떠났다. 이 스님의 이름은 무착대사라고도 하고 의상조사라고도 하나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원주서 치악산을 향해 육십여리 길을 가던 대사는 그 곳에서 다시 시오릿길을 더 가서 지금의 구룡골에 멎었다. 스님이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고 다시 천지봉의 낙맥이 앞을 가로질은 데다가 계곡의 경치 또한 아름다웠다. 절을 세울만한 곳이군. 그러나 대웅전을 세우려면 저 연못을 메워야겠는데.....? 대사는 발을 옮겨 연못가로 갔다. 그때 그곳에 있던 큰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 연못을 메우자니 모처럼 용이 사는 것을 쫓아야겠고 난감한 일이구나.......? 대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연못에 살던 용들이 들었다. 그리고는 대사를 향해 "대사님이 벌써 우리를 내어 쫓을 생각을 하시나 우리도 마음이 안놓여 살수가 없오, 대사와 우리가 서로 내기를 해서 우리가 이기면 대사가 이곳에 절을 못 지을 것이요, 지면은 선뜻 자리를 내어드리리다." 했다. 대사가 "너희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려느냐?" 하느냐" " 그것은 잠시 두고 보시면 압니다." 고 대답한 용들은 연못에서 날아 하늘로 치솟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우박같은 비를 쏟아놓았다. 이 바람에 근처의 산들은 삽시간에 물에 잠기고 대사 또한 물속에 빠져 죽는가 했으나 대사는 태연하게 앉았다가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동안 비를 퍼부은 용들은 이만하면 대사가 물속의 귀신이 되었겠다 생가하고는 비를 거두고 내려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사는 배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홉 마리의 용들이 다 내려오자 부시시 일어난 대사는 "너희들의 재주가 고작 그것뿐이냐 이제 내가 조화를 부릴것인즉 너희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 보아라." 하고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 속에 넣었다. 얼마 안있어 연못에서는 더운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큰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뜨거움을 참다못한 용들은 뛰쳐나와 한다름에 동해바다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아홉 마리의 용 가운데 한마리의 용이 눈이 멀어서 미쳐 달아나지를 못하고 근처에 있는 조그만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용들이 달아나자 대사는 못을 메우고 지금의 구룡사 대웅전을 지었다. 한편 뜨거운 물에 쫓겨 달아나던 용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구룡사 앞산을 여덟 개의 골이 치어있으며, 이때 미쳐 도망하지 못한 눈먼 한 마리의 용은 구룡사 옆에 있는 용소에서 지난 왜정때까지 살다가 그해 여름 장마때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또한 지금 아홉구(九) 대신 거북구(龜)자를 쓰게된 연유는 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쇄에 따른 곡절이 많았다.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고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 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 즈음 한 스님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는 더욱 적어지고 거찰(巨刹 : 큰절)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럴 때 어느날 도승 한 분이 또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하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지요?"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동강으로 내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이 이미 죽었지만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자 대신 거북구(龜)자를 쓰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지금 현판에 새겨진 대로 치악산 구룡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출처: http://www.guryongsa.or.kr/html/ma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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