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천의 아침(출근 길 가끔 ^^......,)
탄천의 아침(출근 길 가끔 ^^......,) 2015.2.25
탄천 [炭川]
탄천은 한강의 지류로서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서 발원하여 성남시를 거쳐, 서울특별시의 강남구 삼성동과 송파구 잠실동을 끝으로 한강으로 유입되는 총연장 35.6km의 하천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종합운동장역~삼성역 사이의 구간에 탄천이 있고 추후에 서울 지하철 9호선의 코엑스역 (가칭)~종합운동장역 사이의 구간으로도 탄천이 관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역사
백제시조(百濟始祖) 온조왕(溫祚王)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이도(移都)한 서기전(西紀前) 6년 이후 온조(溫祚) 28년(서기10) 다루(多婁)를 태자(太子)로 봉(封)하고 세자궁(世子宮)을 지금의 창곡동(倉谷洞)에 지어주어 세자(世子)가 병권(兵權)을 장악(掌握)하여 군사들을 통수(統帥)하였으므로 이 지역(地域)은 강력(强力)한 백제 군사들의 훈련장(訓練場)으로 쓰였다.
이때 군사들에게 밥과 국을 끓여 먹이기 위하여 장작을 연료(燃料)로 때었고 장작에서 나오는 수많은 숯을 후일에 군사들에게 먹일 냇물의 정화(淨化) 작용을 위하여 물에 남겨 두고 감으로서 숯이 내를 이루었다고 하여 부쳐진 이름이 숯내였다. 후에 한문(漢文)으로 탄천(炭川)이라 표기(表記)하게 되었다고 한다.
탄천(炭川)은 태종(太宗) 7년(1407) 10월 12일 기록(記錄)에 의하면 임금이 탄천에서 유숙(留宿)한 기록을 시작으로 태종 12년(1419) 9월 16일에도 탄천에서 유숙하였고 세종(世宗) 9년(1427) 10월 4일에는 갈마재(葛馬峴)의 남(南)쪽에서 사냥하고 탄천(炭川)에서 유숙(留宿)한 기록들이 모두 낙생행궁(樂生行宮)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탄천에서 전국(全國)의 군사들을 모아다가 11만~12만 명의 대군(大軍)으로 대열(大閱)이라는 군사훈련(軍事訓鍊)을 한 기록이 십 수회(十數回)나 기록되고 있다.
현재의 탄천(炭川)은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에 있는 법화산 자락 해발 340m 고지의 남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마북천을 비롯한 수많은 지천들과 합해지면서 용인과 성남지역의 분당, 판교를 거쳐 강남구 삼성동와 송파구 잠실동 사이로 빠져나가 한강으로 유입하는 한강의 지류천이다.
상류에서는 장천, 원우천, 원천, 마희천과 '머내'로 불리듯 맑은 계곡물의 개천이었으나 경기도 광주의 숯공장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검내'라고 불렸으며, 지금은 없어졌으나 이름으로 남아 숯내·숫내·탄천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외에도 냇물이 쉽게 넘쳐서 농민들이 탄식하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탄천이라 부른 것이 와전되었다고도 하며, 조선 경종 때 남이장군의 6대손인 남여이가 살았던 마을을 그의 호가 탄수(炭搜)였으므로 마을 이름을 탄리라고 지었는데, 바로 이 성남시의 탄리(炭里)에서 탄천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오랜 옛날부터 강원도에서 벌채되어 한강을 따라 뗏목으로 운반된 목재가 이곳에서 숯으로 구워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90년대 말부터 상류 지역인 용인에서 개발이 시작되면서 하천으로 생활하수와 공사장의 토사 등이 유입되어 수질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나 최근에는 경기도와 용인시의 생태하천 복원 사업으로 주변 경관과 수질이 좋아지고 있다.
이름의 유래
탄천(炭川)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전설이 얽혀 있다. 그중 하나는 주로 상류 용인지역에서 내려오는 얘기로 염라대왕의 명을 받은 저승사자가 18만 년을 산 동방삭을 잡기 위해 검은 숯을 씻은 하천이라는 뜻에서 탄천이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다.
다른 하나는 중류와 하류에서 내려오는 얘기로 조선시대 때 강원도 등지에서 한강을 통해 목재와 땔감을 싣고 내려와 뚝섬에다 부렸는데, 이 땔감으로 숯을 만드는 곳이 바로 강변에 모여 있어 강줄기가 검게 변했다 해서 예로부터 ‘탄천’ 혹은 ‘검내’라고 불렸다는 전설이다. 그러나 광복후에도 숯공장이 남아 있었던 기록을 보면 후자는 진실에 가깝다.
이곳 죽전 일부지역이 마을에 검고 큰 바위가 있어 감바위, 감암뜰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표기해 현암(玄巖)이라고 지칭하게 되었다는 기록들이 있듯이 단국대학교쪽으로 올라가기전 현암초, 현암중학교, 현암고등학교들이 있다. 검은 돌이 많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이름들이다. 이것으로 ‘검천’,‘검내’라고 불렸다는 전설은 무관하지 않다. 이곳 상류지역 일부는 검은 돌이 많이 깔려 있는 관계로 현재도 물빛마저 검게 보이고 있다. 하지만 흐르는 지역에 따라 상류지역은 장장포 · 장천, 중류지역은 원우천 · 머내 · 또는 마희천 · 험천, 하류지역은 검내 · 검천이라고 불려졌던 것같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하류를 ‘탄천’이라 하고, 상류부근의 발원지는 ‘장천(莊川)’ 혹은 ‘원우천(遠于川)’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법화산에서 발원하여 대지산과 광교산, 백운산에서 내려오는 물들과 합해지는 광경에서 광교산 북쪽 고기리지역의 동구막산에서 발원하는 동막천(東幕川)이 흘러와 합해지는 지점을 ‘원우천(遠于川)’ 이라고 적어 놓아 장천(莊川)과 구별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