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景福宮)
근정문 들어서면 근정전이 나온다.
근정전(勤政殿): 왕이 문무백관에게 조회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며 즉위·책봉·혼례 같은 나라의 주요한 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왕과 나라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이다.
수정전(修政殿), 뒷쪽에 경회루(慶會樓)가 보인다.
경회루(慶會樓): 향원정과 함께 경회루는 경복궁의 여러 정원과 후원 가운데서 가장 주목받는 장소이다. 경회루는 연못 안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은 큰 누각으로 주역사상에 바탕을 둔 우주의 원리를 건축에 담고 있다. 왕이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열 때 이용하였다. 활 쏘기를 좋아한 세조는 경회루에서 연못 너머에 과녁을 설치한 후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연못에 하나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 쏘았다고 한다. 경회루는 어린 단종이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에게 눈물로 옥새를 내어 준 곳이기도 하다.
경회루 북쪽 담장에 난 문으로 하향정으로 이어진다. 1868(고종 5)년에 세워졌다고한다.
만시문 : 경회루 북쪽 담장의 문으로 흥복전의 서편 행각과 통한다.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뒤쪽뜰 북쪽에서 바라본 경회루(慶會樓)
사정전(思政殿): 왕이 평소 머무르며 나랏일을 돌보았던 곳으로, ‘깊이 생각하여 나랏일에 임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세종이 밤늦도록 학문을 연구하고, 집현전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었던 곳도 사정전이다.
강녕전(康寧殿), 교태전(交泰殿)은 각각 왕과 왕비가 생활한 건물이다. 왕은 강녕전에서 독서나 휴식을 하였고, 때로는 신하들과 만나 편안하게 이야기도 나누었다. 국모인 왕비에게는 왕위를 이을 세자를 낳고, 왕실 가족의 화목과 질서를 유지할 임무와 권한이 주어졌다.
아미산(峨嵋山): 궁궐 안에 한번 들어오면 궐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던 왕비를 위해 꾸민 교태전의 정원이다. 야트막한 동산을 계단식으로 꾸미고 곳곳에 나무와 꽃을 가꾸었다. 화단에 세운 육각기둥 모양의 굴뚝에는 학, 박쥐, 봉황, 사슴,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덩굴, 바위 등 무늬를 장식하였다.
현 위치에서 5분이면 달려갈 거리 북악산이 보인다
뒤로 북악산과 잘 어우러져 보이는 향원정
향원정(香遠亭) : 고종이 건청궁(乾淸宮 :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에 기거하던 1867년 경회루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그 중앙에 지은 것이다.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 다리를 놓아 취향교(醉香橋)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의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했다. 朴彦坤 글. 자료출처: 다음백과사전
왼쪽의 팔우정(八隅亭): 2층 팔각 정자형태로 집옥재가 서재라면 팔우정은 고종의 책을 보관했던 도서관으로 보면 될것같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집옥재(集玉齋): 중국 청나라 양식의 외관으로 1876년 경복궁에 불이나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건청궁에 기거했다고 한다. 창덕궁에 지어져있던 집옥재는 1891년에 건청궁 으로 옮겨 자신의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청와대 입구
국립민속박물관
돌탑, 장승
좌측은 국립민속 박물관 우측은 어린이 박물관
연자매
돌하루방, 우물
추억의 거리
효자각(효자비)
자료: 카다로그
경복궁(景福宮) 2010.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