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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흔적

창덕궁(昌德宮)

by 꿈의 숲 2010. 5. 22.

 

종 목 : 보물 제383호

명 칭 : 돈화문(敦化門)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1동

지정(등록)일 : 1963.01.21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2-77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 창덕궁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의 앞쪽은 도로포장공사로 지면이 높아져 약간 묻혀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 5칸 가운데 3칸은 2짝씩 문짝을 달았지만 양쪽 끝칸은 모두 벽을 쳐서 실제로 3칸만 이용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 13년(1413) 문에 동종(銅鐘)을 걸었다는 기사가 있다. 문에 종을 걸었다는 것은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지만, 지금 있는 문은 다시 세운 것이므로 실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돈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궁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세운 문루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회화나무 : 돈화문 주변에는 300~400년 수령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472호)여덟 그루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돈화문 주변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이곳에 조정의 관료가 근무하는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가지를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회화나무는 종종 학자의 기개에 비유된다고 한다.

 

유 물 명 : 창덕궁 금천교

소 장 처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시 대 : 1411년

재 료 : 화강석

크 기 : 길이 12.9m/ 폭 12.5m

창덕궁 금천교(錦川橋)에 새겨진 용의 형상. 창덕궁은 1405년(태종 5)에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로 1459년 세조 때에는 그 규모가 15만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궐 대부분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선조에 의해 복구가 시작되어 광해군 때 완료되었으나 인조반정에 의해 또다시 소실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친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창덕궁은 광해군 이후 고종 때까지 13대에 걸쳐 270년간이나 왕이 정사를 보았던 곳으로 정궁인 경복궁보다도 오랫동안 왕이 거처하던 궁이다. 조선 왕궁에는 북에서 발원하여 외당(外堂)을 돌아 흐르는 명당수가 있고, 이 명당수 위에 석교(石橋)가 설치되어 있다.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 창덕궁의 금천교 등이 그것이다. 금천교는 길이 12.9m, 너비 12.5m로 1411년에 조성되어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화면의 용은 금천교에 새겨진 것이다. 금천교는 교각을 2개의 홍예(虹霓)로 구성하였는데, 물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로 홍예를 틀었으며 양쪽 교대(橋臺)를 석성(石城)처럼 쌓았다. 중앙에 홍예가 모이는 곳에 큼직한 홍예 기석(基石)을 놓아 지복석(地覆石)을 삼았으며, 하마 형상의 석수(石獸)를 배치하였다. 용의 형상은 마치 귀면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자료출처: 문화원형백과

 

검서청(檢書廳) : 서자출신의 학자를 대우하기 위하여 규장각에 둔 벼슬인 검서관이 사관을 도와 서적의 교정과 서사일을 맡아보던 곳. 역대 임금들이 지은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했다. 

 

규장각 [奎章閣] /조선시대의 관아.

설립연도: 1776년

설립목적: 정치, 경제, 사회 등 현실문제의 학문적 해결

주요사업: 국립도서관

규장각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에 두었다가 이듬해인 1895년 규장원(奎章院)으로 고쳐 이때 한·중 양국본의 도서와 각종 왕가 전보(傳寶)를 보관하였으며, 1897년(고종 34) 다시 규장각으로 이름을 환원시켰다. 규장각에는 제학(提學:종1∼정2품) 2명, 직제학(直提學:종2품∼정3품 당상관) 2명, 직각(直閣:정3∼종6품) 1명, 대교(待敎:정7∼9품) 1명 외에 검서관(檢書官) 4명 등의 관원이 있었다. 이 중에서 특히 검서관에는 종래 임용되지 못하던 서얼(庶孼)도 등용하여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맡기어 5품에 해당하는 군직(軍職)을 주었다.

규장각은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편입시켜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인쇄·반포하였으며, 1907년 제실(帝室)의 문한(文翰)·기록을 보관하였다.

1908년 근대적인 직제(職制)를 편성하여 전모(典謀)·도서·기록·문서 등 4과가 사무를 집행하였으며, 이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각 관서의 일기 및 등록과 정족(鼎足)·태백(太白)·오대(五臺)·적상(赤裳) 등의 사고(史庫) 장서까지 관할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로 그 이름이 없어지고, 소장되어 있던 도서는 한때 이왕직(李王職)에 도서실을 두어 보관하고 있었으나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넘어갔다. 이때 넘어간 도서는 5,353부 10만 187책, 각종 기록은 1만 730책에 달하였다.

그러나 1912년 총독부에 참사관실(參事官室)이 설치되어 이들 도서와 관련된 사무는 참사관실로 이관되었고, 1922년 학무국으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이관되었는데, 이때 15만 1519권의 책이 이 대학의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 책들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다.

자료출처: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책고(冊庫): 책보관 창고

 

정숙문(正肅門 : 바르고 엄숙하다)  구선원전의 서쪽담장에 있는 문

 

 

 

 

 

 

 

 

 

 

 

 

 

 

종 목: 보물 제813호

명 칭: 창덕궁인정문(昌德宮仁政門)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85.01.0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창덕궁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은 조선 영조 20년(1744) 불탄 것을 이듬해 복구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인정문 좌우로는 복도건물(행각)이 뻗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일부가 개조되어 건축 구조에 일본식이 섞여 있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225호

명 칭: 창덕궁인정전(昌德宮仁政殿)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85.01.0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창덕궁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밖으로 뻗친 부재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이다.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종 목: 보물 제814호

명 칭: 창덕궁선정전(昌德宮宣政殿)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85.01.0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창덕궁

선정전은 조선시대에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고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임금님의 집무실이지만 왕비가 가끔 이용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왕비가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누에를 치는 행사도 하였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1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탁 트여 있으며 바닥에는 붉은 색의 양탄자를 깔았고 천장에서 멋진 단청을 볼 수 있다. 선정전의 기와는 청색 유리기와인데, 강화에서 육연 스님이 굽던 계열의 기와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다른 건물에도 있었다.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고, 조선 중기 건축재료의 모습을 잘 남기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종 목: 보물 제816호

명 칭: 창덕궁대조전(昌德宮大造殿)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일곽

지정(등록)일: 1985.01.0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창덕궁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낙선재(樂善齋)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 한 여인에 대한 헌종의 깊은 사랑이 담긴 전각이다. 세자를 얻기 위해 간택하여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한 헌종은 경빈 김씨를 무척 아껴 함께 지낼 새 보금자리로 이들 전각을 마련했다. 낙선재는 예술에 관심이 각별했던 헌종이 편안하게 책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며 쉴 수 있도록 마련한 개인적인 공간이다.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석복헌는 ‘복을 내리는 집’이란 뜻이다. 왕실의 ‘복’이란 다름 아닌 세자를 얻는 일이다. 석복헌과 수강재 사이의 뒷문에 장식된 포도 문양도 자손을 얻고자 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만큼 왕의 후궁이 된 경빈 김씨에게 세자를 얻는 일은 매우 절실했다. 그러나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맞이한 뒤 약 2년 만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는 최근까지도 조선 왕실의 후손들이 사용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중전인 순정효황후가 석복헌에서 생활하였고, 낙선재에서는 고종의 넷째아들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수강재에서는 고종의 막내딸 덕혜공주가 생활하였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뒤뜰은 작은 동산이지만, 계단식으로 꽃밭을 만들고 신비로운 모양의 괴석과 돌 연지도 놓아 볼거리가 가득하다. 뒤뜰은 각각 정자가 딸린 후원에 연결되어 있다.

 

 

자료출처: 카다로그, 문화재청

 

창덕궁(昌德宮) 201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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